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곡물 공급망이 큰 타격을 입었다. 곡물 가격이 치솟으면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커지는 상황이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휘말려 곡물 가격의 변동성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생존의 필수재, 곡물 시장에 대한 이모저모를 파헤쳐 본다.
곡물 시장은 어떤 산업?
곡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곡류와 콩류를 통칭한다. 가격이 쉽게 내려가지 않고 생산량에 비해 교역량이 적으며 선물거래 비중이 높다는 것이 특징이다.
- 하방경직성 : 하방경직성이란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르면 내려가야 하는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현상을 말하는데, 곡물은 단기간에 증산하기 어려운 필수재라서 가격이 쉽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표적인 하방경직성 상품이다. 실제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곡물가격의 최대 상승률은 60% 이상까지 치솟았지만, 최대 하락률은 15% 안팎에 머물렀다.
- 얇은 시장(Thin Market) : 곡물은 생산국 내부에서 소비되는 비중이 높아 생산량 대비 교역량이 적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추산한 2021/22년 세계 곡물 생산량과 교역량은 각각 28억 톤과 4억 8,000만 톤으로, 전체 생산량 중 국가 간 거래된 곡물은 17%에 불과할 정도다. 특히나 쌀은 국내 소비 비중이 높은 곡물이기 때문에 교역량은 생산량의 10%뿐이다.
💡 얇은 시장(Thin Market) : 어떤 상품에 대한 공급자의 수와 수요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시장을 의미한다. 공급자와 수요자가 많지 않으므로 거래량도 적고 유동성도 떨어진다. 얇은 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공급자와 수요자의 수가 적기 때문에 상품의 가격 변동이 매우 심하다는 것이다.
- 선물거래 : 일반적으로 곡물을 비롯한 원자재는 현물보다는 선물로 거래된다. 선물거래란 특정 시점에 특정 가격으로 상품을 매매하도록 지금 계약하는 거래 방식을 말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농산물 선물거래 시장이 시카고상품거래소(CBOT: Chicago Board of Trade)다.
세계 3대 곡물 : 🌽🍞🌾
세계 3대 곡물은 바로 생산량과 소비량이 가장 많은 순으로 옥수수, 밀, 쌀이다.
- 옥수수 :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전체 생산량의 55%는 가축 사료로, 35%는 에탄올 원료로, 10%는 식용으로 사용된다. 에탄올은 가장 저렴한 액상 수송원료로, 전체 생산량의 50% 이상이 옥수수 제분 공장에서 만들어지는데, FAO가 추산한 2021/22년 옥수수의 생산량과 소비량은 12억 톤에 달한다.
- 밀 : 아시아에서는 보조 식량에 불과하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보통 주 식량으로 여겨진다. 90% 이상이 제분해 가루 형태로 활용되는데, FAO가 추산한 2021/22년 옥수수의 생산량과 소비량은 8억 톤이다.
- 쌀 : 아시아의 주 식량이다. 밀, 보리와 함께 주요 식량 작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FAO가 추산한 2021/22년 옥수수의 생산량과 소비량은 5억 톤이다.
세계 3대 곡물(🌽🍞🌾), 누가 생산하고 누가 소비하나?
곡물 교역 시장은 몇몇 국가가 장악하고 있는 독과점 시장이다. 대부분 생산된 국가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곡물 수출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국가가 적기 때문.
- 옥수수 :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이하 동일) 2022년 옥수수 생산량 순위는 미국, 중국, 브라질 순으로, 각각 전 세계 생산량의 30%, 24%, 11%를 생산했다. 한편 옥수수 수출량 순위는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순으로, 각각 전 세계 수출량의 27%, 26%, 21%를 차지했다. 주요 수입국은 EU, 중국, 멕시코 등이다.
- 밀 : 2022년 밀 생산량 순위는 중국, EU, 인도 순으로, 각각 전 세계 생산량의 18%, 17%, 13%를 생산했다. 같은 시기 밀 수출량 순위는 러시아, EU, 호주 순으로, 이는 전 세계 수출량의 20%, 17%, 13%에 해당한다. 주요 수입국은 이집트, 인도네시아, 터키 등이다.
- 쌀 : 2022년 쌀 생산량 순위는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순으로, 각각 전 세계 생산량의 29%, 25%, 7%를 생산했다. 같은 시기 쌀 수출량 순위는 인도, 태국, 베트남 순으로, 이는 전 세계 수출량의 38%, 16%, 14%에 해당한다. 주요 수입국은 중국, 필리핀, EU 등이다.
곡물 산업 주요 기업은 어디일가?
세계 곡물 시장은 상위 4개 기업이 총 시장점유율 80%를 차지하는 과점 구조다. 그래서 공급자 교섭력이 높고 곡물가가 상승하면 수익률도 함께 오르는 경향이 있다.
- ADM : 1902년 설립된 ADM은 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둔 글로벌 곡물 유통 기업이다. 저장부터 가공까지의 전 곡물 밸류체인을 수직계열화하며 성장해왔다. 최근에는 바이오 디젤, 대체육류, 탄소 포집 등 친환경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 벙기(Bunge) : 1818년 설립된 벙기는 네덜란드에서 출범하여 아르헨티나, 브라질, 미국으로 확장한 곡물 유통 기업이다. 가축 사료로 사용되는 대두 교역을 주 사업으로 하며 곡물 거래와 식품 가공, 비료 생산 사업까지 영위하고 있으며 EU에 공장을 설립하여 바이오 디젤을 생산하고 있다.
- 카길(Cargil) : 1865년 설립된 카길은 세계 1위 곡물 유통 기업이자 2020년 기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비상장 기업이다. 곡물 종자산업으로 생산, 저장, 수송, 가공, 판매까지 전 밸류체인에 관여하고 있다. 카길의 가장 큰 경쟁력은 촘촘한 항만 운송망을 갖췄다는 점으로, 보유한 화물선만 600여 척에 달한다.
- 루이드레퓌스(LDC) : 1851년 설립된 루이드레퓌스는 프랑스를 주 사업지로 삼은 글로벌 곡물 유통 기업이다. 커피에서 면화까지 거의 모든 곡물을 거래하는 동시에 비철금속, 천연가스, 석유화학, 리조트 등 다양한 사업을 함께 영위하는 종합 기업이다. 2020년 UAE 아부다비 국영지주회사 ADQ에게 지분을 매각해서 UAE에 장기간 농산물을 공급하게 됐다.
곡물 시장의 특징
평균적으로 곡물 시장의 변동성은 다른 시장보다 낮은 편이다. 그러나 금융거래가 활발해지고 식량 안보의 중요성이 올라가면서 최근 변동성이 커지는 추세에 있다.
- 낮은 변동성 : 7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전반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지만 이후부터는 경작지 확대와 농업 기계화로 안정적인 곡물 재고량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한동안 안정적인 곡물 가격이 유지됐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계기로 가격 변동성이 확대되고 변동주기도 짧아지는 추세다.
- 금융시장 동조화(Coupling) : 금융위기 이후 원자재를 대상으로 하는 금융상품이 증가했다. 투기 목적의 금융 거래가 늘어나면서 자금유입에 따른 가격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금융시장의 등락이 곧 곡물상품의 등락으로 이어지는 동조화 현상이 심화했다.
- 식량 민족주의 : 변동성이 커지자 정부가 자국의 물가안정을 위해 수출물량을 제한하거나 수출세를 부과하는 등 식량 안보를 지키기 위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곡물 시장의 불안정성은 더욱 증폭됐다.
곡물 가격 상승이 불러온 ‘애그플레이션’ 위험
2022년 상반기부터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 🧑🌾 애그플레이션(Agflation) : 농업을 뜻하는 ‘agriculture’와 ‘inflation’의 합성어로 2007년 4월 메릴린치의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농산물을 비롯한 국제식량가격 상승이 전반적인 국내 물가 상승으로 파급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애그플레이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품목은 보통 구입빈도가 높아 기대인플레이션을 빠르게 높일 위험이 있다.
- 물가 파급 경로 : 국제 곡물 가격 상승은 우선 사료와 제분, 전분, 당류 등 일차 가공품 가격을 높이는 요인이 되는데, 이후 이 품목을 중간재로 사용하는 육류와 가공식품 가격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르게 된다. 또한 에탄올 등 생활용품 원재료 가격이 상승하며 화장품과 의약품 가격도 함께 영향을 받는다.
- 식량가격지수(FAO) 상승 : FAO란 2014-2016년 평균을 100으로 기준삼아 주요 식표품의 가격 동향을 반영한 지표다. 2020년 FAO는 98.1에 불과했지만 2021년, 28% 상승해 125.7에 달했고 2022년에는 다시 14% 올라서 143.7을 기록했다. 곡물 부분을 살펴보면 2019년 103.1에서 2020년 131.2, 2021년 154.7로 치솟았다.
곡물 가격 상승의 3가지 이유
2022년 곡물가가 급등한 가장 큰 원인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곡물이나 곡물 가공품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두 나라의 농업 생산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지난 2월 전쟁이 발발하면서 글로벌 곡물 공급망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 밀 수출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등 주요 곡창 지대로 꼽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 심지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자국 내 식량난 방지를 위해 밀과 귀리 등 농산품의 수출을 금지하자 글로벌 곡물 공급은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
- 곡물 수출 제한 : 곡물 가격이 요동치자 과도한 곡물 유출을 막기 위한 정책이 잇달아 발표됐다. 4월 인도네시아가 팜유 수출을, 5월에는 인도가 밀 수출을 제한했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만에 식량 수출 통제를 선언한 국가가 35개국을 넘게 됐다.
- 비료 가격 상승 : 중국이 자국 비료가 안정을 위해 2021년부터 시작한 비료 수출 제한 조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던 2022년 3월, 러시아마저도 비료 수출을 전면 중단하자 비료 공급이 급감했다. 에너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천연가스에서 추출되는 비료 원재료인 암모니아와 요소 가격이 크게 오른 점도 기여했다.
한국은 낮은 곡물 자급률이 문제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낮은 곡물 자급률 문제가 부상했다. 쌀을 제외하고는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데, 쌀의 소비량은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이다.
- 과거 높았던 자급률 : 1970년 곡물 자급률은 80.5%였지만, 수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1980년에는 56.0%로 하락했다. 이후 우루과이라운드(UR) 체결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자급률 하락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 결과 2020년 기준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20.2%까지 떨어진 상태다.
💡 곡물 자급률 : 쌀·보리쌀·콩·사료용 작물과 같은 각종 곡물의 국내 소비량 중 국내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
- 너무 낮아진 자급률 : 2020년 기준 옥수수 자급률은 0.7%, 밀 자급률은 0.5%에 불과하다. 특히 밀이 소비량은 빠르게 증가하지만 생산량은 늘지 않아서 수입의존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나마 자급률이 높은 두류도 국내 생산은 7.5%에 불과하다.
- 쌀 수요마저 감소 : 지금까지 곡물 자급률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적었던 이유는 주식인 쌀의 자급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2020년 쌀 자급률은 92.8%이며 풍년인 해에는 자급률이 100%를 초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쌀 수요가 줄고 다른 곡물의 소비가 점점 늘면서 높은 쌀 자급률만으로 식량 안보를 지켜내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요약
곡물 시장은 생산지에서 소비되는 비중이 높아 교역 시장은 몇몇 국가가 장악한 과점 구조를 보이는 산업이다.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곡물 공급이 줄고 비료 가격이 상승하면서 곡물 가격이 치솟았다.
급등한 곡물 가격은 전 세계에 애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한국의 낮은 곡물 자급률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