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렌 버핏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업자로서, 40년 넘게 버핏과 함께 했던 찰리 멍거(Charlie Munger)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이 지난 11월 28일 9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멍거는 투자 철학, 경제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오늘은 찰리 멍거는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을 준비했다.
👨💼 찰리 멍거는 어떤 인물인가?
“내 생에 가장 성공한 투자는 찰리 멍거를 채용한 것”
–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워렌 버핏 –
찰리 멍거(Charles Thomas Munger)는 미국의 기업인이자 전 변호사로, 1924년 1월 1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시에서 출생했다. 멍거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부동산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 1965년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투자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평생 파트너가 된 버핏과는 1959년 오마하의 사교클럽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버핏은 2021년 CNBC 인터뷰에서 “찰리를 만난지 몇 분 안에 평생 함께할 것을 깨달았다”며 “함께 돈을 벌고 즐거워하며 서로에게 아이디어를 얻고 서로 모를 때보다 더 잘 행동할 수 있을 것이란 걸 느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이후 투자 조언을 주고받으며 관계가 깊어졌다. 버핏이 버크셔를 인수한 1965년 멍거도 변호사를 그만두고 전업 투자자로 나섰다. 둘은 버펄로뉴스, 웨스코 등에 함께 투자하며 파트너십을 다졌다.
특히 1972년 버핏이 씨즈캔디를 인수한 것은 멍거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버핏은 800만달러(약 103억원)짜리 회사를 2500만달러(약 320억원)를 주고 사는 것을 주저했지만 멍거는 미래가치를 들며 인수를 강권했다. 이후 버크셔는 씨즈캔디를 통해 누적 20억달러(약 2조 6000억원) 넘는 수익을 거둔다. 이렇게 신뢰를 쌓은 두 사람 관계는 1978년 멍거가 버크셔 부회장으로 합류하면서 더욱 끈끈해졌다.
💰 포커로 연마한 투자 기술
억만장자(포브스 기준 26억 달러) 찰리 멍거의 투자인생 초반부는 특이하다. 그는 대학에서 기상학과 법률을 배웠을 뿐, 경제학이나 금융, 회계 수업은 들은 적 없었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젊은 찰리 멍거는 비교적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는 법률가로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변호사가 그리 큰 돈을 벌지 못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부업으로 한 주식투자와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그는 첫 100만 달러를 버는 데 성공한다. 그는 비즈니스 기술을 군대 시절 포커판에서 연마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패가 불리할 때는 일찍 접고,
호기다 싶으면 그런 기회가 자주 오지 않으니까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기회는 옵니다. 하지만 자주 오진 않으니 왔을 때 꽉 붙잡아야 하죠.”
1959년 그는 고향 오마하에서 친구의 소개로 운명의 파트너, 워런 버핏을 만났다. 버핏이 28살, 멍거가 35살일 때이다. 첫 만남에서 멍거가 농담하면서 바닥을 구를 듯이 웃는 모습을 보고서 버핏은 ‘저 사람은 나 같은 유형의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둘의 캐미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고,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통화하는 사이가 됐다. 버핏은 “소름끼칠 정도로 생각이 너무나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한 그 오랜 시간 동안 사소한 말다툼조차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버핏에게서 자극받은 멍거는 1962년 폐쇄형 펀드인 뉴아메리카펀드 운용으로 투자 업계에 본격 뛰어든다. 1976년 청산 전까지 이 펀드가 올린 연 평균 수익률은 23.4%으로 다우지수 평균 수익률(6.4%)을 한참 웃도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1978년 멍거는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을 맡으면서 버핏과 합류하게 된다.
🌱 ‘가치 투자’의 창시자, 찰리 멍거
멍거는 버크셔해서웨이에 합류하기 전부터 웨스코 파이낸셜(Westco Financial), 씨즈 캔디(See‘s Candies) 같은 기업에 버핏과 함께 투자했지만, 멍거의 투자 방식은 버핏과는 달랐다.
초기 버핏은 이른바 ‘담배꽁초 투자전략’ 신봉자였다. 멘토였던 벤저민 그레이엄이 가르쳐준 투자방식이었는데, 버려진 담배꽁초처럼 마지막 한 모금의 가치가 남아있는 헐값의 주식을 찾아내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회사의 장부가치보다도 주가가 저평가 된 싼 기업만 골라 사는 것이다. 버핏이 죽어가던 직물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를 1962년 인수한 것도 이러한 투자 가치관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멍거는 담배꽁초 투자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엄이 활약했던 1930년대 대공황 때는 건질 만한 헐값 주식이 있었겠지만, 1970년대엔 그런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1930년대는 600년 만의 최악의 경기침체였습니다. 벤 그레이엄은 1930년대 붕괴로 인한 잔해 속에서 주당 운전자본 이하로 팔리는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죠. 고전적인 벤 그레이엄 개념의 문제점은 세상이 점차 현명해지면서 그런 명백한 거래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가이거 계수기(방사선 검출기)를 잔해 위에서 작동시켜도 딸깍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 찰리 멍거, 1994년 USC 연설 中 –
대신 그는 시가총액이 장부가치의 2~3배 수준이더라도, 회사의 내재된 모멘텀을 봤을 때 여전히 엄청난 헐값인 주식을 찾아내는데 몰두했다. 그가 버핏을 설득해 연간 세전 수익이 약 4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씨즈캔드를 2500만 달러에 인수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이 투자로 2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버핏은 2015년 버크셔의 연례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그(멍거)가 나에게 준 청사진은 간단했습니다. 괜찮은 기업을 놀라운 가격에 인수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대신에 훌륭한 기업을 괜찮은 가격에 구매하세요.”
멍거는 버핏에게 항상 “정말 멋진 기업을 사자”라고 강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멍거의 설득으로 씨즈캔디 투자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후 버핏이 1988년 코카콜라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고 한다. 멍거를 ‘버크셔 투자 접근 방식의 창시자’라고 언론이 평가하는 게 과장이 아닌 것이다.
🌟 찰리 멍거 투자법 : ‘준비’와 ‘기다림’이 성공의 크기를 결정한다
버핏이 멍거에게 붙인 별명 중 ‘가증스러운 노 맨(No Man)’이라는 별명이 있다. 버핏이 어떤 기업에 투자하려고 할 때 툭하면 ‘노’를 외치며 막았기 때문이다. 멍거는 늘 이렇게 강조했다.
“승리자는 거의 베팅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포커 게임에서 돈 따는 법과 비슷한데, 1994년 연설에서 멍거는 경마 시스템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즉 가격이 잘못된 것을 찾기 위해 세상을 살펴보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하나를 찾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은 세상이 기회를 제공할 때 큰 돈을 걸었습니다.
나머지 시간엔 걸지 않았고요.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주식도 경마 베팅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열심히 일해서 투자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 기다린다면, 아주 가끔 가격이 너무 싸게 책정된 경우를 만날 거고 그때 크게 베팅하라는 것이다.
그는 “좋은 기회가 올 것을 대비해 1000만 달러를 통장에 넣어두는 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라고 늘 조언했다.
투자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멍거는 간접 투자, 특히 액티브펀드 방식의 투자에 부정적이었다. 소수 종목만 신중하게 골라 사서 장기 보유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데, 뭐 하러 굳이 높은 수수료를 주며 주식을 샀다 팔았다 하는 액티브펀드에 투자하느냐는 거다. 그는 투자 운용사에 돈을 맡기는 게 어리석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낚시 도구 판매원과 나눈 대화를 예로 들었다.
“나는 그 판매원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보라색과 녹색이군요.
물고기가 정말 이런 미끼를 먹나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죠.
‘아저씨. 저는 생선을 파는 게 아닙니다.’”
투자자에게 의미 있는 것(주식으로 돈 버는 것)과 관리자에게 의미 있는 것(수수료를 버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다. 그는 “수수료가 높은 곳은 높은 확률로 바가지를 씌운다”고도 경고한 적 있다. 그는 분산투자라는 개념 자체를 싫어했다. “작금의 분산 투자에 대한 숭배, 나는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좋은 주식을 골라낼 역량이 없는 일반 투자자들에게는 광범위한 지수에 투자하는 인덱스 펀드를 권했다. 지수가 하락했을 때 수수료 싼 인덱스 펀드에 가입해서 은퇴할 때까지 쭉 들고 있으라고 말이다.
🙋 찰리 멍거, 인사이트 가득했던 삶!
사실 찰리 멍거를 유명하게 만든 건 그를 부자로 만든 투자법만이 아니다. 신랄하면서도 통찰력과 유머가 녹아있는 찰리 멍거 명언들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이를 일컫는 멍거리즘(Mungerisms)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멍거는 공식적으로 건축가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학교가 그의 건물 설계를 수락한다는 조건으로 미시간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및 하버드 로스쿨을 포함한 교육 기관에 수억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멍거는 2019년 로스앤젤레스의 하버드-웨스트레이크 사립학교에 과학 센터 건물을 설계하면서 여자 화장실을 남자 화장실보다 크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하면서 “축구 경기나 행사에 갈 때마다 여자 화장실 밖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어떤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같은 크기로 만드는가? 정답은 평범한 건축가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찰리 멍거는 끊임없는 배움을 강조하기도 했다.
“똑똑하지도 않고, 가끔은 근면하지도 않은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이런 사람은 학습 기계입니다.
그는 잠자리에 들 때면 그날 아침보다 조금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갈 길이 먼 사람에게 이는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지금껏 끊임없이 독서를 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명도.
워렌이 얼마나 책을 읽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내가 얼마나 읽는지 알아도 마찬가지고.
우리 애들은 나를 발 달린 책이라고 놀리죠.”
그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점차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렇게 부자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행복한 사람의 비결을 묻는 질문엔 사려 깊은 대답을 들려주기도 했다.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시기심과 원한이 많지 않고, 수입을 과하게 쓰지 않으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쾌활함을 유지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거래하고,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이 모든 간단한 규칙은 삶을 더 좋게 만드는 데 효과적입니다.”
🫂 굿 바이(Good-bye) 찰리 멍거 !
올해 99세였던 찰리 멍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도 유수의 언론들과 줄곧 인터뷰를 하곤 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부고 기사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사망 뒤에 나온 여러 인터뷰 기사 중에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가 매우 인상 깊었는데, 멍거를 20년 동안 취재해온 제이슨 츠바이크 기자는 그에게 “10단어 이하의 비문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즉각 이렇게 답했다.
“나는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I tried to be useful).”
실제 자신이 유용했는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할 일이라는 겸손함. 억만장자 투자자 찰리 멍거가 돈 말고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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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모르는 걸 인정하고, 자신의 역량 범위를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억만장자 투자 천재로 불리는 그는 성공의 많은 부분은 행운 덕분이고, 자신은 그저 노력했을 뿐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세상 속 거인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듣는다. 투자에서의 성공과 거대한 부는 찰리 멍거에게 그저 그가 걸어온 삶 속 한 부산물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 의 부(富)가 아닌 그 의 태도를 닮고자 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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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멍거 인생